책소개
가볍지 않은 유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의 작품을 써야만 했으므로 글은 가볍고 간결하다. 그는 ‘안토샤 체혼테’, ‘내 형의 동생’, ‘쓸개 빠진 놈’의 필명을 사용해서 1865년부터 발행된 ≪자명종≫을 비롯한 유머 잡지에 단편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기에 러시아의 사회문제를 흥미롭게 풍자하는 소품 형식인 푀이통(feuilleton) 장르와 패러디 작품을 써서 인기 있는 유머 작가가 되었는데, 이 시대를 그의 필명 중 하나를 따서 “체혼테 시대”라고 부른다. 체호프는 당시 1년에 100편 이상의 작품을 썼는데, 1880년부터 1887년까지 발표된 작품 중 훌륭한 것들을 선정해 실은 것이 바로 ≪체호프 유머 단편집≫이다. 1880년대 후반의 체호프의 작품들은 초기에 썼던 가벼운 유머 작품들과 초기 단편들의 순수한 웃음에서 점점 멀어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즉, 유머가 풍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웃음이 비극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체호프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 주는 글쓰기 방법을 통해 독자의 관심을 끈다.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1880)는 그야말로 작품 전체가 한 통의 편지 형식이란 점이 특징으로, 주인공은 이웃의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과학적 발견들을 은근히 자랑하는 우스꽝스럽고 현학적인 태도를 보인다.
<재판>(1881)은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한 가장의 폭력 행위를 통해 19세기 말 러시아의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를 유머러스하게 비판하면서 풍자하고 있다.
<만남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1882)는 주인공이 자신의 술주정과 거짓말로 인해 소냐에게 퇴짜를 맞는 이야기다.
<이발관에서>(1883)는 등장인물들이 행위를 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공간적 배경에 해당하는 ‘이발관’을 작품명에 반영했다. 이는 체호프가 등장인물의 일상생활을 주요 소재로 해서 작품을 즐겨 썼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그 밖에 이 책에서 <바냐에서>(1885) 역시 등장인물들의 행위 공간인 대중목욕탕 바냐를 작품명에 반영해서, 19세기 말 러시아 처녀 총각들의 결혼 문제와 연관된 세태를 유머러스하고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뚱보와 홀쭉이>(1883)는 희극적이고 예기치 않게 갑자기 끝나는 결말이란 구성 원칙을 바탕으로 사회와 인간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또한 의인화를 통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의 외면적 묘사가 두드러지고, 이는 부자연스럽고 긴장된 상황과 분위기를 한층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체호프의 유명한 풍자적 걸작들 중 하나인 <카멜레온>, <말[馬]의 성(姓)>도 역시 같은 유형이다.
<프리시베예프 하사>(1885)는 주위 사람들을 감시하고 구속하며 괴롭히는 폐쇄적이고 하찮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풍자한다.
<부인들>(1886)은 사모님들의 취직 청탁을 비판한다.
200자평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가 고학을 하면서 돈이 필요해 썼던 유머 소설들을 모았다. 이 시기 작품들은 후기 작품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지지만, 그의 미래 문학의 자양분이 된다. 당시 그는 1년에 100편 이상씩 썼다.
지은이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남부의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출생했다. 잡화상의 아들로, 조부는 지주에게 돈을 주고 해방된 농노였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서 중학 생활을 마쳤다. 1879년에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그와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편소설을 오락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전반, 수년에 걸쳐 <어느 관리의 죽음><카멜레온><하사관 프리시베예프><슬픔> 등과 같은 풍자와 유머,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많이 남겼다. 작가 그리고로비치의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가 담긴 편지에 감동하고 자각해 <초원>을 썼다. 희곡 <이바노프><지루한 이야기> 속에는 그 시대 지식인들의 우울한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1899년에 결핵 요양을 위하여 크림 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단편소설 <결투><검은 수사><귀여운 여인><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골짜기> 등을 집필했다. 1896년 희곡 <갈매기>의 상연 실패는 그를 담시 극작가의 길에서 멀어지게 했으나, <바냐 아저씨>를 써낸 이듬해인 1898년, 모스크바 예술 극단의 <갈매기> 상연은 성공적이었다. 1900년에 극단을 위해 <세 자매>를 썼다. 만년의 병환 속에서 <벚꽃 동산>을 집필해 1904년에 상연하고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해 요양지인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작고했다.
옮긴이
이영범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에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대학교에서 <푸슈킨의 ‘대위의 딸’의 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2005). 현재 청주대학교 어문학부 러시아어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러시아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디오 러시아 문학 감상과 이해 1, 2≫, ≪테마 러시아 역사≫(편저), ≪러시아어 말하기와 듣기≫(공저), ≪쉽게 익히는 러시아어≫(공저), ≪한러 전환기 소설의 근대적 초상≫(공저), ≪러시아 문화와 예술≫(공저), ≪표로 보는 러시아어 문법≫ 등이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러시아 제국의 한인들≫(공역), 푸시킨의 ≪대위의 딸≫, 톨스토이의 ≪참회록≫과 ≪인생론≫ 등이 있다. 그리고 주요 논문으로는 <뿌쉬낀의 ‘대위의 딸’의 시공간 구조와 슈제트의 연구>, <고골의 중편 ‘따라스 불리바’에 나타난 작가의 관점 연구>, <푸슈킨의 ‘보리스 고두노프’에 나타난 행위의 통일성>, <뿌쉬낀의 ‘스페이드 여왕’의 제사(題詞) 연구>, <뿌쉬낀의 ‘벨낀 이야기’의 삽입 텍스트 연구(1) - 에피그라프(Epigraph)를 중심으로>, <‘보리스 고두노프’에 나타난 뿌쉬킨의 역사관>, <뿌쉬낀의 ‘벨낀 이야기’의 삽입 텍스트 연구(2) - 서술 속에 삽입된 이야기, 편지, 시 텍스트를 중심으로>, <뿌쉬낀의 ‘보리스 고두노프’의 구조와 슈제트>, <‘예브게니 오네긴’과 ‘안나 카레니나’에 나타난 타치야나와 안나의 운명, 사랑, 형상>, <고골의 ‘이반 꾸빨라 전야’에 나타난 민속적 요소와 기독교적 모티프> 외 다수가 있다.
차례
해설
지은이에 대해
이웃 학자에게 보내는 편지
재판
만남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이발관에서
알리비온의 딸
뚱보와 홀쭉이
보드빌
외과 의술
세상에 보이지 않는 눈물
카멜레온
장군과 결혼식
살아 있는 연대기
바냐에서
가물치
말[馬]의 성(姓)
계략을 꾸미는 자
프리시베예프 하사
부인들
별장에서
복수
복수자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돼지 새끼 같은 그놈 때문에 사할린으로 가다니, 이것도 현명한 짓은 못 돼’라고 시가예프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유형 간다면, 그년이 재혼할 가능성을 갖게 돼. 그렇게 되면, 그년이 좋아 자빠져 으스대면서 두 번째 남편을 맞을 테지… 그러니, 그년도 살려 두고, 나도 죽지 말고, 그놈도… 역시 살려 두는 게 낫겠어. 더 현명하고 혹독한 방법을 궁리해야겠어. 그것들을 모욕해서 벌을 주고, 이혼 수속을 밟아서 추문을 세상에 폭로하는 거야….’
“므시외, 또 다른 신형 권총이 있습니다”라고 점원이 장에서 한 다스의 신형 권총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뇌관에 특수 장치가 돼 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시가예프가 아무도 죽이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는 권총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점원은 여전히 자기 앞에다 권총을 늘어놓으며, 더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모욕을 당한 남편은 점원이 자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웃음을 팔고, 쓸모없이 기를 쓰며 칭찬했다는 생각을 하니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하고 시가예프는 중얼거렸다. “다시 내가 오든가 사람을 보내든가 하겠습니다.”
그는 점원의 얼굴 표정을 보지 않았으나, 다소 면목이라도 세울 양으로 다른 물건이라도 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을 살까? 그는 무엇이든 값이 싼 것만을 고르며, 상점의 벽을 두루 살폈다. 이윽고 그는 문가에 걸린 풀빛 그물에 시선을 멈추었다.
“저… 저건 뭐죠?” 하고 그가 물었다.
“메추라기 잡는 그물입니다.”
“얼마죠?”
“8루블입니다, 므시외.”
“싸 주시죠….”
모욕을 당했던 남편은 8루블을 주고, 새 그물을 받아 든 다음, 한층 더 모욕당한 기분을 느끼며 상점 문을 나섰다.